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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아카] 당신은 영원한 나의것 上

Fong 2016. 6. 19. 22:40


원래는 6월의 쿠로아카데이 ' 영원할줄 알았던 ' 주제로 쓰던 글인데...

음... 주제는 안 벗어난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근데 너무 길어지고.. 이번달 안에 못올릴거 같아서....


역키잡..(?), 나이반전 주의 해주세요.

아카아시가 연상, 쿠로오가 연하입니다.






한참 비어있던 쿠로오 가의 앞의 주택에 누군가가 이사 온 모양이었다. 무성하게 자라 있던 잡초가 저번 주 월요일에 전부 뽑혀있었고 저번 주 수요일에는 장미넝쿨이 심겨져 있었다. 단 며칠 만에 담과 철제 구조물을 덮었다. 모두가 시선을 두지 않았던 집이었기에 어른들은 ‘이 집에 사람이 살았던가?’ 라고 서로 묻기에 바빴다. 하지만 쿠로오 테츠로는 매일 아침마다 그 집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알았다. 장미는 단 며칠 만에 자라났다. 마치 몇 년에 걸쳐 자라난 것처럼 피어나 있었다.

담과 아치형의 철제 구조물을 덮은 붉은색의 장미는 마치 세상으로부터 안쪽을 보호하는 것 같았다. 잎사귀와 꽃 사이로 빛이 조금씩 들었다. 비가 왔던 금요일에는 흰색 철제로 된, 영국 아가씨들이 앉아서 티타임을 즐길 것만 같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저번 주 일요일부터 강한 햇살 아래에 만들어진 장미 그늘 아래에 어떤 남자가 앉아서 티타임을 즐겼다. TV에서나 보았던 홍차잔과 3층으로 쌓아 올려진 그릇들과 한 손에 들린 두꺼운 책. 어둠 따윈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은지 태연한 얼굴이었다. 홍차를 홀짝이다가 가로등이 켜질 때가 되면 홀연히 사라졌다.

집안에 들어갔다고 하기에는 부자연스러웠다. 쿠로오 테츠로는 단 한 번도 집에 불이 켜진 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궁금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 남자이며 왜 어둠속에서만 생활을 하는지 궁금했다. 밖을 나돌아다니고 탐구활동을 시작한 초등학생은 어둠을 좋아하는 그 남자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장미 넝쿨들 사이에 틈이 있었다. 초등학생의 손이 들어갈 정도의 틈이었기에 손을 먼저 집어넣고 흔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무언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화단 아래쪽이라서 보이지 않은 걸까. 쿠로오 테츠로는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이려고 숨을 들이켰다.


“문 열려있어.”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들은 쿠로오는 대문을 밀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어머니께서 보셨더라면 혼이 날 법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표정을 구기지도 않고 시선을 책으로 두었다. 쿠로오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초등학생은 아직 대화의 기술이나 스킬이 없었다. 쿠로오는 나이에 비해 제법 말을 잘 하는 편이었지만, 자신이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쉽게 문을 내어주는 것을 보고 쿠로오는 자신이 궁금한 것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왠지 대답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와 있었어?”


쿠로오는 아치형의 장미 그늘 안에 앉아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그 질문에 책에서 시선을 때고 쿠로오를 보았다. 남청색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무미건조한 얼굴이 살포시 웃었다. 한 순간 누그러진 얼굴이 보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잔뜩 경계하던 길고양이가 드디어 다가와서 손에 머리를 부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보고 있었잖아? 테츠로.”


가르쳐 준 적도 없는 이름을 부르자 쿠로오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쿠로오가 겁먹은 것을 본 그 남자는 이번에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남청색의 날카로운 눈동자를 담은 눈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무섭다면, 공포를 맛보았다면 이만 사라지라는 경고 같았다. 너 같은 어린애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묻는 건데.”


당돌한 초등학생인 쿠로오의 대답에 후후, 하고 웃은 남자가 책을 덮었다. 예쁜 주전자에서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 홍차를 따랐다. 마치 쿠로오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매번 하나밖에 없었던 그가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비어있는 찻잔에도 홍차를 따랐다. 향기로운 냄새가 그 작은 정원에 퍼졌다.


“얼른 이쪽으로 오는 게 좋아.”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골목으로 들어오는 차가 보였다. 쿠로오의 어머니의 차였다. 그 차를 발견한 쿠로오는 빠르게 장미 그늘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쿠로오의 어머니는 옆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말라거나 관심을 주지 말라며 창문에 커튼을 달아 주었다. 쿠로오는 조심스럽게 그가 준비한 의자위에 앉아서 숨을 죽였다.

차가 집 앞에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쿠로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직접 집안으로 들어가 차고의 문을 열었다. 최근에는 학교에 다녀와서 놀러다니기 바빴기 때문에 쿠로오의 부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힐끗 맞은편의 장미들을 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차에 올라 차고에 주차시켰다.


“어떻게 알았어?”

“화요일에는 항상 이 시간에 들어가던데.”

“그게 여기서 보여?”


신기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오에게로 시선을 주고 자신이 앞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목을 축였다. 느긋한 그의 행동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말 대신 검지를 새워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소리로 들은 모양이었다. 사실은 맹인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쿠로오의 앞으로 3단 접시에 쌓인 맨 아래쪽에서 참치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자신에게 놓아주는 것을 보고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신은 이름이 뭐야?”


아저씨 라고 부르기에는 젊어 보였고 형이라고 부르기에는 묘하게 나이가 있어 보였다. 일면식도 모르는 남자에게 능청맞게 삼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초등학생이었으나, 그에게는 그러한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당신, 이라는 어중간한 호칭에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집앞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아저씨라 부르며 능글맞게 부르는 당돌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카아시 케이지.”

“케이지라고....”

“아카아시라고 불러.”


존댓말은 안 써도 돼? 좋을 대로 해. 아카아시라고 밝힌 남자는 존칭에 연연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양하지 않은 쿠로오는 곧바로 아카아시라고 불렀다. 아카아시가 준 샌드위치는 자신이 먹어본 샌드위치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홍차는 태어나서 처음 마셔보았지만 많이 떫지도 않았고 향기로웠다.

창밖에서 보는 아카아시는 차갑고 메마르고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저것 챙겨주는 모습을 보니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웃는 얼굴도 좋았다. 그 얼굴을 마냥 좋았다고 표현하기에는 초등학생인 자신의 표현력이 부족했다.






그 후 쿠로오는 종종 아카아시의 집으로 놀러갔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말도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도 개의치 않았다. 시선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점 횟수를 거듭하면서 달라진 점은 쿠로오가 오면 보던 책을 잠시 덮고 홍차를 따라 주고 3단 접시에서 먹을 것을 꺼내 주었다. 배가 고픈 날에는 샌드위치를 주고 간식을 먹고 온 날에는 달콤한 초콜릿을,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케이크나 타르트를 주었다. 마치 쿠로오의 상태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쿠로오는 그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얼그레이라는 홍차를 좋아하고 눈앞의 예쁜 디저트나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은 본인이지만, 먹는 것은 즐기지 않는다.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애완동물은 기르지 못하고 붉은색 장미를 가장 좋아하고 식물이나 원예에도 조예가 깊고 항상 읽고 있는 책은 독일어로 된 책인데, 쿠로오의 눈에는 다 같아 보였지만 전부 다른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카아시는 직업이 뭐야?”


아카아시가 준 타르트를 다 먹은 후에 더 달라고 부탁해 볼까, 하고 고민하는 사이 아카아시가 먼저 손을 뻗어서 견과류가 올라간 작은 타르트를 쿠로오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거의 바닥을 보이는 찻잔에 홍차를 따르고 우유를 부어 투명한 홍차를 탁하게 만들었다.


“집사야.”

“집사?”


그 커다란 저택에서 외눈 안경을 쓰고 흰 머리와 콧수염을 기르고 정장을 입고 한 손에는 항상 맨질맨질한 수건을 들고 다니는 그 직업을 말하는 건가? 쿠로오는 아카아시의 직업이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질문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해뜨는 시간에는 항상 이곳에 앉아 있다가 저녁에 사라지면서 집사라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직업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쉬고 있지만, 원래는 집사야.”


게다가 말하는 표정은 담담하고 진실해 보였다. 사실 미미하게 웃는 것 외에는 무표정을 짓는 사람이라서 쿠로오는 아카아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읽어내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알아내야 했다.


“여기로 휴가 온 거야?”

“아니, 그만뒀어.”

“왜?”


오늘따라 집요하게 묻는 쿠로오의 질문을 무시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계속 알려달라고 물고 늘어지는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곤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곤란한 질문은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굳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아카아시는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고 오직 ‘궁금함’ 하나만으로 다가오는 쿠로오의 질문을 무시하지 못했다.


“테츠로. 잠깐 손 좀 줘볼래?”


타르트를 씹던 쿠로오는 아카아시가 자신의 양쪽 손바닥을 보여 내미는 것을 보았다. 그 위에 작은 손을 포게자, 아카아시가 손끝에 힘을 주고 안쪽으로 굽혀 쿠로오도 자연스럽게 아카아시의 손가락을 맞잡은 상태가 되었다. 아카아시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이렇게 손을 잡아주잖아?”

“응.”

“하지만 점점 아이가 자라면,”


살짝 힘을 주어 잡던 손가락을 아카아시가 새끼손가락부터 하나씩 천천히 놓았다. 아카아시가 쿠로오의 손등으로 시선을 두다가 다시 눈을 맞춰 주었다.


“이렇게 하나씩 놓아주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와.”


모든 손가락을 풀어낸 아카아시가 쿠로오를 보며 말했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무미건조한 얼굴이 아니었다. 쿠로오는 마치 자신이 버려지는 것 같아서 손을 자신의 무릎 위로 두려는 아카아시의 손을 덥썩 잡았다. 쿠로오의 얼굴에 불안함이 스친 것을 보고도 아카아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 손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 걸어나갈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야. 테츠로.”


잔잔한 목소리가 장미그늘 안에 울렸다. 결혼하기 직전의 사촌보다는 어려 보이는 그가 마치 아이를 여러명 키워본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입 밖으로 이상해, 라는 말은 내뱉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상한 것 투성이였기에 이제 와서 굳이 이상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왜 그만뒀어?”

“체력에 부쳐서. 슬슬 쉴 때도 되었고... 지금까지는 여유를 즐기지 못했거든.”


흐응, 타르트를 넣는 쿠로오의 눈이 커졌다. 맛있어, 라고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쉬러 왔는데 최근 자신의 집에 놀러오는 꼬마 덕분에 다시 할 일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할 일이 조금은 있어야 생활에 활기가 도는 법이다.






초등학교때는 그저 맛있는걸 주는 손길을 타버린 길고양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쿠로오는 자신이 아카아시를 그저 말수가 적지만 자신을 잘 챙겨주는 이웃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보며 챙겨주는 간식이라던가, 즐거운 일이 있어 재잘재잘 떠드는 것을 경청한다던가, 풀이죽어 있을 때는 평소처럼 간식을 자신몫의 그릇에 올려주고 책을 보았다. 그리고 돌아갈 때 예쁜 그림이 그려진 조금 빳빳한 냅킨에 마카롱과 과자를 싸주었다.

그런 아카아시가 좋아서 날마다 찾아갔다. 어머니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늘 어머니가 찾기 전에 돌아가야 했는데, 그 시간까지도 기가막히게 맞춰서 이제 곧 갈 때가 되지 않았냐며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다. 매번 친구들과 동네를 누비며 놀던 쿠로오는 아카아시와 시간을 보내면서 조용하고 차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쿠로오는 예쁘거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단어를 생각나지 않아서 ‘주변과는 조금 다르지만 멋진 사람’이라고 멋대로 생각했었으나,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아카아시는 섹시한 사람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있잖아, 아카아시. 나 궁금한게 있는데.”


아카아시는 그늘 속에 있으면서도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좋아한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장미그늘 아래로 이따금씩 빛줄기가 들어오면 그것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 햇빛을 맞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몸을 뒤로 살짝 뺐다. 궁금한 것을 말해보라는 듯 책으로 향하던 눈이 쿠로오에게 닿았다. 저 눈이 자신에게 닿을 때 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왜 여기 밖으로 안 나가는 거야?”


그동안 금기와도 같이 취급하던 것을 입밖으로 냈다. 아카아시는 항상 그늘 속에 있다. 노을이 지고 금세 땅거미가 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장미정원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있었다. 해가 내리쬘 때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매번 신기했지만, 그냥 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아무리 부모님 눈을 피해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해도 거절했다. 쇼핑도, 산책도 심지어는 마츠리조차 가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과 밝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인공포증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지만, 이웃들이 일이 있어 찾아오면 웃으며 맞이하는 걸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마츠리는 밤에 하는 거잖아.”

“사람이 많은 곳은 가고 싶지 않아.”

“아카아시, 사실은 그냥 집밖이 싫은 거 아냐?”


나 그거 학교에서 배웠어. 대인기피증? 그거 심각한 병이래. 쿠로오의 말에 푸흐, 하고 웃었다. 최근 쿠로오는 아카아시에게 찾아오는 시간이 줄었다. 학교에서 배구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때도 배구는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초등학생이라는 한계 때문에 늦게까지 하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활동은 점점 늦게 끝나고 매일 찾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아침에 엄마가 최근 자신이 집에 붙어있질 않아서 외롭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당연한 순리라는 것처럼 가끔 시간이 나서 아카아시에게 들리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몫의 그릇을 준비해 두면서도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쿠로오가 오면 책을 읽지 않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쓰기 시작한 안경을 덮힌 책 위에 올려놓고 부드러운 눈으로 쿠로오를 본다. 그 눈이 자신에게 닿을 때 마다 살갗이 타는 것처럼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이건 무슨 기분일까, 하고 생각하다보면 항상 그 끝에는 아카아시가 있었다.

왜 일까, 라고 매번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막연하게 아카아시가 궁금했다. 배구에 빠져있을 때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배구가 아닐 때에는 그가 생각났다. 무얼 하고 있을까,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와 같은 것을 생각했다. 밥을 먹을 때는 자신의 앞에선 단 한 번도 티푸드를 먹은 적이 없는 아카아시가 밥을 잘 먹는지, 잠을 잘 때는 밤이면 자취를 감추는 그가 잘 자고 있는지 같은 것들이 궁금해졌다.


“쿠로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더 이상 테츠로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이유는 이제는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이라면서 취급은 어린애였다. 일은 아직도 쉬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금전적 문제를 겪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5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카아시는 자신을 대한 태도 외에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안경을 쓰는 것 외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전부 다 이상한 것 투성이였다. 왜? 라고 물을 법 하지만 아카아시의 얼굴을 보면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맹금류와 비슷한 눈이 좋았다. 마른 손이 자신의 앞으로 티푸드를 옮겨줄 때마다 간식보단 그 손에 눈이 더 간다.

쿠로오는 아카아시의 허벅지를 한 손으로 짚고 일어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아카아시에게 다가가서 입을 맞추었다. 쿠로오는 눈을 감았으나, 아카아시는 눈을 감지 않았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아카아시는 목석처럼 굳어 있었고 쿠로오는 답을 찾았다.






아카아시는 알고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이 자신보다 몇 배는 어린 아이가 창문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 때부터, 화단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어 인사를 하고 조심성 없는 아이가 허겁지겁 자신의 집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신을 처음 제대로 본 날부터 계속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

말이 좋아 관심이지 호감을 뛰어넘은 감정이다. 한 눈에 반했다는 진부한 표현을 쓰는 것이 정확한 감정이었다. 알면서도 아카아시는 그 아이를 쳐내지 않았다. 그 짧은 인생 중 일부를 행복하게 보낸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입술을 맞추었을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결국 그 날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쿠로오는 찾아오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 자신을 훔쳐보거나 아침 연습에 가기 전 자신의 집 앞에 서서 바라보다가 급하게 뛰어가긴 했지만, 절대로 찾아오지 않았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감정일 것이다.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속상했다. 그래도 함께 있으면 즐거웠는데.


“어라? 요즘은 안 오나보네?”


대문이 열리는 소리도 없이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돌연 정원에 나타났다. 햇빛 가운데에 서있던 남자는 여유있는 걸음으로 아카아시의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 조금 떨어진 곳에 두고 앉았다. 그를 위한 홍차는 없었다.


“먹었어?”

“설마요.”


멋들어지게 꾸민 갈색 머리의 남자는 아카아시의 자신의 옷 안에서 작은 병을 꺼내들었다. 병안에는 붉은색 액체가 들어있었다. 병 안에든 붉은 찻잔에 반이나 부었다. 갈색 빛이었던 홍차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아카아시는 호오, 하고 홍차를 표면을 식힌 후에 입에 한 모금 넘겼다.


조금 도와줘야 할 일이 생겼는데 말야.”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하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만족스러웠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눈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아직도 눈앞의 그가 섞어준 액체의 맛을 잊지 못한다는 것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웃어버렸다. 이러다가 100년은 더 살겠군,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모셨던 주인이 자신이 그곳을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카아시는 100년은 더 살거 같은데, 투덜거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카라스노랑 서류상의 문제가 생겨서 말야.”

“나오기 전에 정리해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만족스럽다. 아카아시는 다시 붉어진 홍차를 목 뒤로 넘겼다. 입안에 가득 차 혀를 휘감는 맛과 목 뒤로 넘어갈 때 나는 비릿한 맛이 좋았다. 어떻게든 떨쳐내 보려 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100년이 뭐야, 200년도 더 살겠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게 말야, 우리랑 카라스노랑 서류가 안 맞아.”


그것 때문에 오이카와씨는 잠을 설쳤다구, 되지도 않는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안식에 접어든 이후로 가끔 찾아와서 일에 관한 것을 묻거나 회의로 결정 난 중요한 사항들을 알려주거나 하는 정말 딱 겉치레뿐이던 방문들뿐이었다. 항상 같이 다니던 짧은 머리의 남자도 보이지 않은 것을 보니 정말 개인적인 부탁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런 것도 들고 오는 걸 보면 부탁 외에도 무언가 있다.


“그것뿐인가요?”

“그리고 정보화? 한다고 우리도 인터넷이랑 컴퓨터 설치하고 전산망을 만들라고 하잖아. 미쳤어?!”

“그거 생각보다 편해요. 일부러 전달하거나 중간에 분실될 위험도 없고.”

“내가 걱정하는 건 그 중간과정이거든? 본인들이야 컴퓨터 같은 게 익숙하겠지만, 이쪽은 그게 아니잖아.”


벌써 몇 번이나 이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하도 여러 사람에게 이것에 대해 토로했던지라 진절머리가 났다. 스스로를 오이카와라고 칭한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면 해결책을 말해줄 때도 되었는데, 아카아시는 계속 홍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항상 철벽처럼 굳은 표정을 짓던 그가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아카아시와 만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오늘 처음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이카와보다 어리다는 것이 티가 났다. 어린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잘 숨기지 못한다는 점이 귀여웠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굴어도 역시 어려서 미숙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건 둘째 치고서라도, 그거 설치하는 건 인간이잖아? 중립지역도 아닌데 인간이 오면 어떻게 되겠어?”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마 카라스노나 시라토라자와는 ‘그 부분을 어떻게 해 달라’ 라는 요구를 했던 모양이다. 사정을 아는 카라스노보다는 시라토리자와가 더 강력하게 주장했으니 자신을 찾아왔겠지. 중립지가 아닌 곳에 인간이 오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된다. 자신들이 인간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도 문제이긴 하나, 포식자와 피식자의 차이는 상당하다.


“그래서, 결론은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발적인 참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로드.”


거절하지 못할 선물까지 줘 놓고, 지금까지 제 할말을 하던 그가 저런 호칭으로 자신에게 요청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 위에 올려두었던 안경을 챙겼다. 멀뚱멀뚱 아카아시를 쳐다보던 오이카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그 상태로 가려고?”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자발적 참여’ 잖아요? 굳이 갖춰 입을 필요는 없죠. 회담 직전에 찾아오셨을 리도 없고요.”


아카아시의 말에 오이카와가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은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티푸드가 가득 담겨 있고 티코지로 감싸져 있는 주전자는 여전이 뜨끈했다. 홍찻잔은 깨끗하게 비워지고 그 옆에는 읽다만 책이 놓여 있었다. 금방 돌아올 것처럼, 아카아시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입술을 맞대고 2주 정도는 분명 정원에 있었다. 하지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비가 시작된 저녁부터 아카아시는 정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는 창밖으로 지켜보거나 장미로 담장 너머로 기웃거려 보았지만, 금방 돌아올 것처럼 홍차와 티코지가 덮힌 주전자, 읽다만 흔적이 역력한 책,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3단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는 문도 열어 보았지만 닫혀있고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동안 만났던 시간이 허무하고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그동안 꿈을 꾸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배구를 했다. 아카아시가 생각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다른 것에 집중했다.

겨울에도 장미는 시들거나 마르지 않았다. 어느새 테이블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빈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입을 맞추는 게 아니었다. 감정은 명확하게 되었지만, 아카아시는 받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 그냥 하지 말걸, 후회로 입이 썼다. 그래도 아카아시가 보고 싶었다.





아카아시가 없는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입을 맞추었던 봄과 여름의 경계를 지나 여름이 뜨겁게 익어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을 막 넘겼다. 슬슬 시원한 여름밤으로 접어들 중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 끄트머리의 그날, 쿠로오는 아카아시를 꿈에서 보았다. 축축하고 기분 나쁜 상태로 눈을 뜨고 한숨을 쉬고 창밖으로 보이는 집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방학숙제를 하다가 아카아시를 보았다. 어깨가 걸려 목을 쭉 뻗어 좌우로 비틀다가 이웃과 이야기를 하는 아카아시가 보였다. 옆집에 사는 사와다네 아줌마였다. 무언가 말하면서 짧게 인사를 하고 다시 장미그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쿠로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밖을 뛰쳐나갔다. 다행이도 집에는 혼자뿐이었다.


“아카아시!!”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아카아시가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쿠로오를 보았다. 자신의 앞에 선 쿠로오를 보고 나서야 어라,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살짝 웃으며 말했다.


“키, 많이 컸네.”


안경을 쓰고 여러 장의 서류 가운데에 둘러싸인 아카아시가 눈을 깜박이며 한다는 말이 고작 ‘키가 많이 컸다.’ 라는 이야기라니. 쿠로오는 얼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동안의 자신의 고민과 괴로움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카아시는 자신을 찾아온 쿠로오를 곤란한 얼굴로 보았다. 장미 그늘의 아래는 온통 서류투성이였다. 하얀 재질의 종이부터 색이 바랜 종이도 있었으며 근대와 관련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재질의 서류와 그 이전에 사용했던 것 같은 종이도 있었다.


“어디 갔었어?”

“조금 일을 도와주러.”

“일?”

“개인적으로 부탁을 받았거든.”


부드럽게 말하는 아카아시는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서류를 찾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색 노트북을 새우 눈을 하고 보다가 정보를 기록하고 다시 서류를 분류해두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도와줄까?”

“괜찮아.”

“내용은 안 볼게.”


쿠로오의 말에 아카아시는 그가 자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입도 맞추었지. 잠시 도와주러 다녀온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그것마저도 잊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보는 것은 괜찮았지만, 우선 쿠로오가 근본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봐도 상관은 없는데... 네가 알아볼 수 없을 거야.”


그 말에 쿠로오가 의문을 품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쿠로오는 모르는 다른 나라의 언어였다. 아카아시가 웃으며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이런 것일줄은 몰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 사람인데, 조금 더 붙어있을 구실을 찾고 싶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옆에서 바라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방학숙제 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가져와. 가르쳐 줄게.”


일단 오늘은 돌아가, 정리가 안 되어 있으니까. 쿠로오는 아카아시의 말에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카아시의 움직임에 그동안 막연하게 나빴던 기분이 둥실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입을 맞추었던 문제는 그 상태로 덮어 두었다.

방학 내내 아카아시는 며칠 보이지 않다가 보이기를 반복했다. 책 대신 서류 비슷한 것을 넘겨보다가 이마를 짚었고 인상을 찌푸렸다.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서류만 노려보다가 금색의 태가 빛나는 팬으로 빈 종이에 글을 쓰거나, 서류들을 잔뜩 가져와서 또 찾아보고 컴퓨터에 입력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쿠로오는 방학숙제를 들고 그런 아카아시를 계속 바라보았다. 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모른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넌지시 힌트를 주거나 답을 알려주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부모님은 ‘모르는 건 스스로 찾아서 공부해라’ 라고 했을 정도인데 아카아시는 쉽게 알려 주었다. 마치 1+1을 알려주는 것 같아 보일 정도로.

개학을 앞둔 일주일 전, 여름합숙을 끝내고 찾아간 날에는 서류를 든 상태로 아카아시가 졸고 있었다. 양손에 서류를 들고 고개가 앞으로 까딱까딱거렸다. 앞으로 꼬꾸라질 것 같이 자는 모습에 쿠로오는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서류를 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3단 접시는 사라졌다. 대신 하얀 트레이에 홍차만 있을 뿐이었다. 가끔 붉은색의 작은 병도 놓여 있었다. 약이라면서 홍차에 희석해서 마셨다. 홍차에 희석시킨다기 보단 약에 홍차를 희석시키는 수준이었지만, 아카아시는 그 약이 담긴 홍차를 마시면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여전한 테이블 위를 구경하다가 다시 잠이 든 아카아시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을 뜨고 있을 때 항상 어딘가 범접하기 힘든 느낌이었는데, 졸고 있는 모습이 무방비했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보여서 더 쉽게 보였다. 어릴 때는 그렇게 어른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카아시에게 닿고 싶다. 작년에 후회했던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보다도 더 한 것이 하고 싶어졌다.


“케이지. 자?”


몇 번이나 꿈에서 나왔던 아카아시를 앞에 두고 쿠로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쥐고 한 번 더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따뜻한 온기가 혀끝에 전해져왔다. 쓴 홍차맛와 알 수 없는 맛이 났다. 바닥에 고인 물을 마시는 참새처럼 조심스럽게 혀를 놀려 입을 탐하다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 나서 아카아시에게서 떨어졌다.

숨을 몰아쉰 쿠로오는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떴다. 들어올 때와 달리 큰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달렸다. 아스팥트를 밟은 쿠로오의 발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들으며 아카아시가 눈을 떴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감쌌다. 쿠로오의 입술이 닿았던 입술을 검지로 더듬다가 얼굴을 붉혔다.

위험하다. 말년이 되어서야 이런 기분을 맛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카아시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긴 세월동안 해보지 않았던 고민을 이제야 하는 것이 웃기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은 첫눈이 온다고 했던 날이었다. 정말 무언가 내릴 모양인지 하늘이 우중충 했다. 쿠로오는 문득 아카아시의 집에 핀 장미가 검붉은 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흑장미라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아마 지금 아카아시의 담장 너머로 피어난 장미가 흑장미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되었다. 아카아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장미를 만지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남의 집 물건은 함부로 만지면 안 돼지. 소년.”


인기척도 없이 자신의 뒤로 다가와서 어깨를 감싼 남자의 손에 깜짝 놀라 올려다보았다. 갈색의 멋지게 손본 머리카락, 누가 보아도 잘 생겼다고 평가할 외모의 남자가 웃고 있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특유의 능글맞음과 능청스러움으로 벗어날 수 있다. 그에게서 피 냄새가 나지 않고 손에 낀 장갑에 피가 묻어있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아카아시 만나러 왔어?”

“어떻게....”

“자주 만나러 왔잖아. 나 계속 보고 있었어.”


어디서? 어떻게? 쿠로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보면 서로 알고 지낸지 오래된 사이이고 굉장히 다정해 보이는 말과 행동이었다. 아카아시의 집의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오래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저런 소리가 났더라, 하고 생각했다.

정원에 들어서자 아카아시는 숄을 걸치고 있었다.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났다. 헤에, 하는 오이카와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셔츠 한 장에 숄 하나를 걸치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과 함께 들어온 남자도 겨울치고는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전혀 추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금방이네.”


아아, 이제 일도 못 시키겠어. 오이카와의 중얼거림에 기침을 멈춘 아카아시가 피식 웃었다. 말만 저렇게 한다는 것을 안다. 쿠로오가 같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오이카와에게선 인간의 피 냄새가 났다. 어디서 뭍히고 온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최대한 태연하게 반응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럴리가요.”


콜록콜록, 잔기침을 하며 홍차를 조심스럽게 마셨다. 같이 온 쿠로오를 보며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오이카와가 소리 내어 웃었다. 피냄새가 나는 것을 맡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리 귀여워 하던 인간 꼬마도 데리고 왔으니 당황할 수 밖에. 아카아시는 말년에도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며 쿠로오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어내고 아카아시에게로 다가갔다.


“이거 주려고 왔어. 앞으로 5년 정도는 버텨달라고.”


오이카와가 탁자에 올려둔 것은 아카아시가 먹던 붉은 약이었다.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한 아카아시에게 말로 전해주려 했던 것을 종이로 건네주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받은 전보였으나, 오이카와가 다시 돌아갈 쯤에는 이 전보는 이미 소용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을 받은 아카아시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아카아시의 시선은 온통 쿠로오에게로 가 있었다. 얼마나 신경이 쓰이길래, 오이카와는 자신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늦여름부터 쭉 붙어있는 것은 보았다. 사실 그 오랜시간 붙어 있는데 아무런 감정이 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 건강히 지내.”


오이카와는 평범한 사람처럼 문을 지나쳐서 나갔다. 나가기 전에 힘내, 소년. 이라는 말까지 하고 나갔다.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사라지면 되는 일이다. 아카아시가 쉬는 곳을 시끄럽게 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쿠로오는 자신이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을 제외한 무언가가 오고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일부러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는 것은 할 필요가 없거나 해선 안될 이야기라는 것이다. 게다가 쿠로오는 아직 어리다. 키가 커서 자주 오해를 받지만, 어쨌거나 아직도 중학교 2학년인 상태이다.


“추우면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밖이 좋아서.”


그 말을 마치자 마자 기침을 했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쿠로오가 장미정원 안으로 들어오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카아시가 홍차를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쿠로오는 자신이 직접 하기 위해 손사래를 쳤다. 평소라면 아니라면서 아카아시가 직접 따라주었겠지만, 몸이 안 좋은탓에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 아카아시. 감기는 옮기면 낫는 데.”

“그래서? 옮아주려고?”


아카아시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투였다. 농담도 진지하게 들려오는 사람이라 쿠로오는 잠시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했다. 아카아시는 기침이 또 나오기 전에 따뜻한 홍차로 목을 적혔다. 그나마 따뜻한 것이 들어가면 조금 진정이 되었다. 쿠로오는 자신의 말에 많은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라고 한 말이었다. 아이라면 웃으며 넘길 것이고, 어른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정도의 가벼운 말이다. 케이크를 눈앞에 두고 손을 뻗을지 말지 고민하는 표정과 닮아 있었다. 쿠로오의 고민하며 고뇌하는 표정은 흥미롭다.

아카아시가 지긋이 바라보는 것을 보던 쿠로오는 결국 입술을 맞대었다. 아카아시는 거부하지 않고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쿠로오가 사랑스러워서 아카아시는 손을 뻗어서 목을 감싸 안았다. 5년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10년은 아슬아슬하겠지만. 쿠로오에게는 긴 시간이겠지, 하지만 이미 그와 알고지낸 시간도 긴 시간이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제법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쿠로오가 눈앞에 있으면 길어야 10년인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몸은 뜨거운데 공기가 찼다. 추운지 더운지 알 수가 없었다. 입술을 때고 나서도 아카아시가 감싸 안은 팔을 풀지 않는다. 서로 이마를 맞닿게 본 상태로 새하얀 숨결이 퍼져나갔다. 이게 뭐지, 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파악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쿠로오의 머릿속에는 생각보다 능숙한 아카아시의 혀와 살짝 입을 때고 쉬었던 호흡, 자신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 살짝 고개를 틀어 키스를 퍼부을 때 마다 마찰하는 콧망울의 감각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뜨끈뜨끈한 아카아시의 이마와 비교적 차가운 자신의 이마가 맞닿아 있다. 입을 열어 조금만 움직이면 서로의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항상 한 줄기의 햇빛이 오가던 장미넝쿨 사이로 새하얀 결정이 떨어졌다. 첫눈이 오고 있었다.


“좋아해.”


숨기지 않고 내뱉는 감정의 덩어리에 아카아시는 그저 웃었다. 자신이 말하고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쿠로오의 얼굴은 자신이 보았던 쿠로오의 표정 중 가장 우스꽝스러웠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카아시는 자신이 살아온 그 긴 세월이 허무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날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시간이 날 때 마다 아카아시네로 찾아가면 아카아시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얇은 숄이었지만, 추워질수록 두꺼운 옷과 담요를 걸쳤다. 하지만 목도리는 하지 않았다. 집에서 보는게 낫지 않아? 라는 쿠로오의 질문에 ‘좋아하는 사람과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봐야지.’ 라고 대답해서 심장이 뛰는 소리 때문에 아카아시가 다음에 하는 말을 잘 못 들었다.

점점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쿠로오는 열심히 설득해서 그를 집 안에서 일하게 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약속했기에 한 행동이었지만, 아카아시는 스스로 쿠로오가 찾아오지 않는 날에 집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불이 켜지지 않지만, 겨울의 아카아시는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쉬는 것, 자는 것 외에는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근 10년 중 가장 추운 겨울이라는 리포터의 말이 생각났다. 그 해의 겨울은 혹독했다. 결국 아카아시는 쿠로오와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장미 정원과는 어울리지 않게 거실에 있는 코타츠에 들어가서 반은 일을 하거나 쿠로오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반은 졸았다.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이 끝나갈 쯤의 아카아시는 수척해졌다.





너무 길어져서 일단 끊습니다.

단편 하려고 했는데 에이포로 10p가 넘어가길래 '이건 아냐..' 라고 생각하고 끊습니다..


원래 나눠서 올리면 끝을 잘 안맺는 경향이 있는거같은데ㅋㅋㅋㅋㅋㅋㅋㅋ


믿는다! 미래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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